여자의 팔자

고원자(영문학과 '66년 졸업)

이제 거의 환갑나이가 된 사람이 자랄 때의 경험을 말하면 젊은 후배들에게는 호랑이 담배 필 때의 얘기를 듣는 것 같겠지만 혹시나 내 경험담에서 무슨 도움되는 것이 있을 가하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여기에 솔직한 고백을 한다.

나는 자라면서 "팔자 , 특히 "여자의 팔자 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그 "팔자 라는 어휘는 좋은 일에 부치면 "팔자 좋다 고 하고 나쁜 일에 부치면 "팔자 고약하다 고 하는 주위 어른들 생각으로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고 좋던 싫던 더 싸우지 말고 그 주어진 환경 안에서 체념하고 살라는 것이다. 여자의 팔자가 좋으려면 적당한 나이가 되면 부모 마음에 드는 신랑감을 구해 얼른 결혼해서 단란한 가정을 꾸며야 된다는 역설도 계속 들어왔다. 이제 나이가 들어 모든 일이 다 인력으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하니, 그렇게 파란곡절이 많은 고생스러운 생애를 거친 우리 어머니가 모든 것을 "팔자 로 돌렸던 것이 이해되고도 남는다. 우리 어머니 세대, 나 보다 30년 먼저 태어나서 그 당시 사회의 구속과 대대로 내려오는 구습 사이에 끼어서 주체의식이란 상상도 못할 그때의 여자들의 처지에는 별수가 없었을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도 "사주팔자 운명관에 많이 의지를 하셨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자신이 고씨 집에 시집을 온 것도 팔자, 애들을 일곱 명이나 낳게 된 것도 팔자, 시집살이 심하게 하게된 것도, 하물며 젊어서 6.25 사변을 거친 것도 자기의 팔자로 돌렸으니깐 말이다. 이런 주위 환경 속에서 살면서도 이화에서 길러준 독립정신으로 내 삶은 내가 개척해야 된다는 결심이 생겼고 의식적으로, 무의식 적으로 그 "팔자 로 단정되는 테두리를 벗어 날려는 치열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미국유학 올 준비를 아무도 모르게 해놓고 미국으로 떠나오기 며칠 전에 식구들에게 알리니 "시집갈 나이인 처녀 가 남의 나라에, 그것도 신랑감을 거기에 정해놓고 가는 것도 아니고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타국에 홀로 공부하러 간다는 것은 허락할 수 없는 일이라고 야단이 났다. 집에 마치 벼락이 친 것 같은 분위기에서 어머니는 며칠씩 통곡을 하시면서 내 마음을 변경할 것을 떠나오기 전날까지 애원하셨다. 결국에는 "네가 팔자가 세기 때문에 객지에 혼자 떨어져 나가는 것 같다고 체념을 하시기는 했지만, 그때 어머니 말씀 듣고 주저앉았으면 미국에 와서 그 안 되는 영어로 공부하느라고 허덕이면서 고생하는 팔자를 면했을지도 모르겠다. 대학원 졸업이 가까워지자 결혼 권고, 중매 등으로 또다시 온 식구전체가 노처녀 처리문제에 동원이 되었다. 빨리 시집가서 팔자를 고치라는 얘기다. 누가 태평양을 건너와서까지 집안 가족의 간섭을 이렇게 계속 받게 될지 알았겠는가? 한국에 식구들을 띠어놓고 낯선 땅에 떨어지게 되는 두려움과 불안감 속에서도 "이제는 자유인 이 되었다는 해방감을 느꼈던 것도 잠시 뿐, 공부 끝냈으니 한국으로 돌아와 시집가라는 식구들의 권유는 들은 척도 않고 직업 구하는 데에 골몰했고, 드디어 나는 여기서 좋은 직장에 취직이 되어 한국에 돌아가는 것을 연기하여야겠다는 통고를 했다. 어머니의 걱정은 태산같이 늘어가고 있었다. 편지마다 자기 팔자에 노처녀 딸을 가지라는 것으로 되어있는가 보다고 자포자기를 하면서 한탄하고 계시는 판에 나는 여기 미국 청년과 사랑에 빠져 곧 결혼해야겠다는 소식을 받은 식구들은 마치 폭탄을 맞은 것 같은 충격 속에서 결혼식이 끝나는 날까지 무소식이었다. 나중에 듣고 보니 어머니는 하도 실망하고 노염에 차서 이 결혼만은 "팔자 로 돌리 시지도 못하고 친척들에게 면목이 없어 국제 결혼한 이 딸에 대한 얘기를 그 후부터 전연 꺼내시지 않으셨다고 한다.

나는 지금 30여 년 전에 있었던 일들을 돌이켜 보면서 어머니 속을 무척이나 썩혀 드린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또 죄송할 뿐이다. 왜냐하면 내 자신이 엄마가 되고 보니 이제야 엄마의 진심을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사랑하는 딸은 자신같이 고생하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해서 열심히 가르치시고 보호해 주신 어머니의 품을 예고도 없이 박차고 나가 어머니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인생 길을 택해 걷고 있는 딸에 대한 애처로움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끊이지 않았다. 이왕 미국 사람한테 결혼은 했을망정 인제 엄마가 되었으니 집에 들어앉아 애들 기르는데 전심하라는 어머니의 마지막 충고도 받아들이지 않은 딸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돌아가시기 전에 결혼한 지 30년이 되어가고 있는 우리부부가 아직도 사이좋게 잘 살고있고 손주 아들 둘이 똑바로 성장한 것까지 보실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위로를 받는다.

우리 세대가 성년이 되어 그 동안 거쳐온 40년 동안 세상이 많이 변했고 옛날의 관습이 많이 무너져서 지금 사회로 진출하고 있는 젊은 여성들은 우리가 대학 문을 나서면서부터 겪어야만 했던 어려움을 뚫고 나갈 필요도 없을 것이다. 허지만 옛날이건 지금이건 간에 여자로 태어난 우리는 사회의 밑바탕이 되는 가정생활을 유지하면서 사회활동을 동시에 잘할 수 있는 바쁘고 힘든 여생 속에서 으례히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어른들의 권고, 선배들의 충고를 참고로 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지만 교육을 받은 현대여성이 일생의 중요한 전환점에서 결정을 할 때 제일 중요한 요소는 자기의 진심에 귀를 기우려야 된다는 것을 이제 많은 세월을 살아온 후에 깨닫게 되었다. 남의 눈치나 체면 때문에 자기의 개성을 부정해 버리고 남만 따라서 인생 길에 들어서면 아마도 더 많은 혼동과 갈등 속에서 헤매다가 자기의 갈 길을 찾지 못하는 후회를 할 것이다. 내가 지금 젊은 후배들에게 일러주고 싶은 말, 그 동안 오래 살면서 얻은 지혜는 내가 몇 년 전에 감동 깊게 읽었던 책 "Follow Your Heart (By Susanna Tamaro)의 한 대목이 훨씬 더 조리있게 대변해줄 수 있을 것 같아 여기에 인용한다.

As you grow up, you'll often get the urge to change things, but the first and the most important revolution has to take place within yourself. Fighting for an idea without having an idea of yourself is one of the most dangerous things you can do. So, when many roads open up before you, listen to your 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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