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생각하며 나누며>




뉴욕과 꽃피는 산골

배 상희(영문학과 '65)

뉴욕에서 위스컨신으로 이사온 지도 벌써 25년이 넘어 가는데 나는 아직도 일 년에 한 두 번은 뉴욕에 다녀온다. 어머니가 그 곳에 계시고 딸아이가 그 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이유가 있지만 나는 그 현란하고 요란한 도시에 가서 소용돌이치는 사람들 물결에 섞여 다니다가 이런 저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에게서 풍겨지는 삶의 냄새를 맡기를 좋아한다. 시커먼 지하철역에서, 허름한 피짜집 앞에서, 멋스러운 레스토랑 앞에서 나는 그 안을 기웃거리며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엿보고 또 내 나름대로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뉴욕은 내가 처음으로 미국에 발을 딛은 도시다. 시집올 때 명동 양장점에서 맞춘 연분홍 양단 투피스에, 같은 감으로 만든 커다간 장미꽃을 앞단추에 달고, 생전 처음으로 해보는 긴 비행기 여행 끝에 도착한 곳이다. 그곳에서 살면서 한동안은, 먼 이방에 와 있다는 신기로움과 두고 온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섞인 심정이어서 인지, 일상적인 평범한 광경들도 모두 이색적으로, 또 어딘지 서글픈 모습으로 보였다. 어스름한 저녁 무렵 아파트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가로수에 반쯤 가린 길, 육중한 철문이 닫혀있는 - 교회이기에는 너무 음울해 보이는 - 담장이 넝쿨에 덮인 돌집, Edward Hopper의 그림처럼 고독한 표정의 사람들이 높직한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Chuck-Full-o-Nuts 커피 샵. 소란한 지하철역에서 처량한 음악을 들려주는 노변 바이올리니스트….

그 곳에서 남편은 밤잠을 걸러가며 병원 인턴 노릇 하느라, 나는 Brooklyn에서 만하탄 꼭대기까지 지하철 통근을 하며, 김활란 선생님이 연결해 주신 감리교 선교 본부에서 짧은 영어로 비서 노릇 하느라 지쳐있었지만, 주말이면 부지런히 차이나타운에 가 반찬거리도 사고, 남들의 충고대로 이발기계를 사서 서로의 머리를 깎아주며 이상스러운 머리 스타일로 돌아다니기도 했다. 남색 테 두른 하얀 모자와 남색 줄이 발등을 가로지르는 흰 구두를 사서 신고 한국에서 가져온 씰크 봄 코트 차림으로 Bronx 동물원을 휘돌기도 하고, "To Sir With Love 니 "Man for All Seasons 같은 영화도 찾아다니면서 지냈다. 그때 우리는 젊었고, 그래서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남아있는 시간의 감소를 의미한다는 따위의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직도 우리 앞으로 굉장히 흥미로운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막연히 믿으며 그 거대하고 색다른 도시에서 조금은 어리둥절하게 Alice in Wonderland 같은 일 년을 보냈다.

그 후 Connecticut에 가서 남편의 레지던시를 하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 올 때에는 큰 아이와 함께 폭스바겐 차를 몰고 왔다. 간신히 구한 아파트는 하이웨이 바로 옆이어서 하루 종일 자동차 달리는 소리가 윙윙거렸고, 큰 맘 먹고 깔았던 황금색 양탄자에서는 일 년 내내 휘발유 같은 냄새가 없어지지 않아 머리가 아팠다. 뉴욕타임스 일요판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불란서 영화나 오페라 같은 것을 찾아다니기도 했지만, 나는 많은 시간을 아파트 안에서 지내거나 아이를 스트롤러에 태우고 좀 삭막한 근처 아파트 주위를 돌며 보냈다. 늦여름에는 길가 집 울타리에 붉은 열매가 열리곤 했는데, 먼지가 뽀얗게 덮인 열매를 보면, 자동차 소음과 먼지 속에 서있는 그 나무들과 그 황량한 거리에 서있는 나 자신 조차도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가시덤불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빨간 열매들이 뜨거운 햇볕 아래 독을 뿜듯이 선명하고,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작달막한 소나무들이 솔 냄새 풍겨주는, 언젠가 어릴 때 올라가 본 듯한 그런 산으로 가고 싶다는 염원 같은 것, 신선하고 정겨운 것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3년을 보내고 우리는 뉴욕을 떠나, 겨울에는 눈이 많지만 흩어진 근처의 호수들이 몹시 아름다운 위스컨신에 와서, 밀워키 근교의 작은 타운 생활을 하며 여러 해를 살았다. 남편은 소아과 의사 일을 상당히 좋아하며 열심히 살았고, 나는 둘째를 낳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리가 뉴욕으로 다시 갔을 때는 남편이 죽음의 그림자에 쫓기고 있었다. S K Cancer Memorial 에서 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는 동안의 뉴욕은 두렵고 슬프고 막막한 곳이었다. 남편은 수술 후 아픈 몸을 끌고 병동 아래 층 활동실에 내려 가 누군가 그 곳에 꽂아 놓은 꽃들을 여러 가지 색깔을 엇섞어 그렸다. 항상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벼르던 그는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마지막 시간에 화사한 색깔의 꽃과 과일을 그렸다. 어느 날 그곳에 음악 프로그램이 있다고 해서 내려갔다. 그 방에는 수술 받고 세 번 째 재발되어 입원한, 머리칼이 빠진 것 외에는 비교적 건장해 보이는 청년도 있었고, 멀리 중국에서 수술 받으러 온 가냘프고 맑은 얼굴의 아기 엄마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내장이 흘러 내려온 것 같은 튜브들을 달고 그 아기 엄마 또래의 성악가가 부르는 사랑의 가곡들을 들었다. 그 음악이 가슴을 도려내듯이 처절하게 아름다웠고 우리의 아픔 역시 너무나 절절해서 우리는 같이 울었다. 그리고 남편은 떠나갔다.

그 후로도 나와 뉴욕과의 관계는 지속된다. 어머니도 계시지만 딸아이가 콜럼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그 곳에 가진 탓이다. 80세 연세에 영어를 배우신다며 지하철과 버스로 두 시간을 왕복하시는 어머니.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뉴욕에 완전히 매료된 딸아이. 우리는 밤늦게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곰탕집엘 가고, 음악회와 연극 구경을 간다.

그리고 나는 그 곳에서 물결처럼 부딪혀오는 사람들을 본다. 지하철의 창백한 형광등 아래서 낯선 외국어 신문을 읽는 중년 남자, 잠자는 어린아이를 무릎에 누인 채 지친 표정으로 허공을 쳐다보는 라틴계 젊은 여인, 어깨가 좁은 반백의 노인부부. 이 거대한 도시에서 한 알의 모래알 같은 그들의 외로움을 읽는다. 맨발로 흙을 밟을 수 있고, 지친 다리를 담구어 식힐 수 있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고향에 대한 그들의 그리움을 느낀다.

그런가 하면 5번가 쌕스 백화점에서 천불 짜리 쌔틴 침대 시트를 사는 여자. 밍트 코트 차림으로 금색 손잡이가 달린 아파트 문을 열고 강아지를 끌고 나서는 늙은 여인. 샨들리에가 화려한 링컨 센타. 반짝이는 다이야몬드 목거리를 한 여인과 그녀의 들어 난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고 말을 건네는 조각 같은 푸로파일의 젊은 남자. 길 하나 사이를 두고 화려한 부와 비참한 가난을 함께 포유하고 있는 뉴욕.

그래서 나는 여름이면 길 건너 농가에서 방금 딴 옥수수를 사 먹을 수 있고 바구니 가득 딸기도 딸 수 있는 위스컨신에 살면서, 뉴욕의 유혹에 끌려 가끔 그 곳에 가 헤매다 온다. 내 젊음이 지나갔고, 지금 어머니의 말년이, 또 딸아이의 젊음이 지나가고 있는 뉴욕. 그곳의 언저리에서 사는 사람들의 아픔과 외로움, 그곳의 엄청난 화려함과 아름다움이 유혹하면 나는 또 집을 나선다. 그러다가도 간혹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하는 노래를 들을 때면, 붉은 열매를 보며 솔나무 들어선 산을 그리워했듯이, 진달래 꽃, 살구꽃 피는 나의 고향, 나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내 마음의 고향을 가끔 가슴 저리게 그리워하면서 산다.
 

Next Article

Back to July 2002 Newsletter

Back to Newsletters

Back to Home